제12막 제25화::만약의 미래와 확실한 지금/반리
[타이치]
그런―― 같이 하자, 반 쨩!
[오미]
모처럼 여기까지 했는데 아깝잖아.
[사쿄]
……맘대로 해. 단, 두 번 다시 이 기숙사의 문턱을 넘지 마.
[쥬자]
연기를 생각하는 마음은 죽어도 안 져. 진 적 없어.
[사쿄]
내버려 둬, 효도. 저런 걸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다.
[반리]
잘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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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출기한은 목요일이다. 잊지 마.
[반리]
……. (진로 희망이라……)
-
[아즈미]
"제1희망 T대로 쓴다. ……졸업전까지 진짜로 하고 싶은 걸 찾으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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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리]
(2학년 때 아즈미 녀석이 그런 말을 했었지. 지금은 농담이라도 그런 거 쓸 기분도 안 들어)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를 해보고,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애가 타서 기세 좋게 극단을 관두고……)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확신으로 바뀌었어. 내 인생은 타인의 인생보다 훨씬 텅 비어있는 걸지도 몰라)
(만든 이야기로 연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애초에 난 인생 최대의 후회 같은 것도 없어. 내 과거의 선택에 잊을 수 없는 후회를 할 만큼 진지하게 고른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녀석들은 있다는 거겠지…… 같은 판에서 쓰러뜨리고 싶었던 효도에 비해서 나는 얄팍하고 텅 빈 17년을 살아왔다는 건가)
(아니, 유조 아저씨도 감독쨩도 내가 최하위라고 했어. 효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누구보다 내 인생이 얄팍했다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했더니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게 무서워졌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그런 거 알 바냐. 나는 결과를 알기 전에, 가을조 녀석들의 인생을 알기 전에 그만뒀어. 그러니까 진 게 아니야. 애초에 타인의 인생 같은 거 진심으로 아무래도 좋아……)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지)
-
[강사]
이번 워크숍은 연출 입문편입니다. 여러분은 연출에 관련된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반리]
(감독쨩하고 참가한 워크숍보다는 나한테 맞는 것 같아)
(그보다 참가자가 꽤 많네. 나랑 비슷한 나이에도 연출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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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그럼 지금부터 20분간 쉬겠습니다.
[반리]
――야.
[학생A]
?
[반리]
왜 연출에 관심을 가졌어?
[학생A]
뭐? 아~ 왠지 배우를 하다 보면 연출 같은데 관심이 가지 않아? 나중에 어느 쪽으로 갈지도 모르는 거니까 일단 공부해둬서 나쁠 건 없지 싶어서.
[학생B]
난 원래 스태프 지망이라 무대에 대해 종합적으로 공부해두려고.
[학생C]
나도 배우 한길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무대로 먹고 살 거면 여러 가지로 공부해둬야겠다 싶었어.
[학생D]
난 원래 연출 희망이야. 배우로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서 연출가로 전향할 거야. 언젠가 내 극단을 세우는 게 목표고.
[반리]
호~ 그래? 다들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구나…….
(그보다 내가 이렇게 타인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없었지.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런 내가 타인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
그럼――.
그럼, 정말로 쥬자 군한테 이긴 건지 아닌지 자기 눈으로 확인해볼래?
지금까지 연습하던 거 본 걸로 충분해.
쥬자 군의 포트레이트는 본 적 없잖아.
…….
쥬자 군한테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직접 보고 똑바로 확인해보지 그래?
딱히 안 봐도――.
이대로 가버리면, 꼭 결과를 알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 것 같아.
――. 알겠어. 확인해보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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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쨩, 알려줘. 나는 어떻게 하면 효도를 이길 수 있지?
반리 군…….
응? 어떻게 하면 돼?
……우선, 연기와 똑바로 마주할 것. 그리고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이건 이미 있는 것 같네.
……. 효도의 포트레이트를 보고, 왠진 모르겠지만 뜨거워졌어. 그 녀석과 싸우고 졌을 때처럼 흥분됐어. 이대로 끝낼 순 없어, 끝내게 두지 않을 거야.
-
……포트레이트 하자.
어?
감독쨩 말고, 가을조 모두의 포트레이트를 본 건 나밖에 없잖아? 그래서 든 생각인데. 그거 분명 서로 보여주는 게 좋아. 특히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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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리]
(틀림없어, 그날 본 포트레이트로 가을조 멤버의 인생에 이끌려서 관심을 가지고 난 바뀌었어. MANKAI 컴퍼니라는 극단에서 수많은 지랄맞게 웃긴 인생을 접한 걸로……)
(MANKAI 컴퍼니가 이상한 놈들만 모인 장소였으니까, 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거야)
(저번 만개 공연 때, 주연으로 MANKAI 컴퍼니 모두의 중심에 섰을 때는 마음이 설렜어. 그건 분명, 진심으로 이 극단 놈들 한명 한명을 존경하기 때문이야)
(내가 MANKAI 극장에 설 이유 같은 건 이미 정해져 있어. ……그 녀석들과 함께하니까 마음이 설레는 거야. 그 녀석들과 함께가 아니면 안 돼)
(고등학교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때는, 내 인생에 이렇게 마음이 동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말려준 감독쨩, 그리고 한 번 더 나를 받아들여 준 가을조 녀석들에게는 은혜를 입었어. 나는 그 극장 무대 위에서 은혜를 갚아가야 해)
(그때까지는 죽어도 그만둘 수 없지)
-
[반리]
무거워…… 너무 많이 샀다고. 정말이지. 식기 같은 건 지금 안 사도 되잖아.
[반리 누나]
아웃렛이니까 지금밖에 못 사는 거야. 그보다 벌써 쉬고 싶다니, 나약하기는.
[반리]
아, 왜! ……여기저기 끌고 다니기나 하고.
[반리 누나]
답례로 너한테 어울리는 옷 사줬잖아. 여기도 내가 낼 거고.
[반리]
하~
[반리 누나]
그런데 여기, 네가 찾은 거 아니지? 차분하고 좋은 카페야. 누가 알려준 거지?
[반리]
나도 극단이니 미대니 인간관계가 넓어졌으니까.
[반리 누나]
그러게. 전에는 짐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데려갈 수 있었는데.
요즘엔 불러도 오늘은 종일 게임하는 날이라느니, 방탈출 게임하러 간다느니, 미대에 볼일이 있다느니 휴일에도 일정이 꽉 차서 불편하다니까.
[반리]
애초에 갑자기 끌고 가지를 마.
[점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커피 두 잔 나왔습니다.
[반리 누나]
……맛있어.
[반리]
그렇지?
[반리 누나]
왠지 짜증 나~
[반리]
아니 왜!
[반리 누나]
아, 그러고 보니 나올 때 본가에 들렀는데 네 앞으로 그림엽서가 왔다고 해서 받아왔어.
[반리]
그림엽서? 아~ 사쿠야인가.
[사쿠야]
"여행하러 와서 우연히 정말 놀라운 사람을 만났어. 반리 군도 놀랄 거야. 돌아가서 만나서 얘기해줄게."
[반리]
(내가 놀랄 거라니…… 누구지?)
[사쿠야]
"반리 군이 이어준 바통은 반드시 골까지 가지고 갈게. 만개 공연, 같이 성공시키자!"
[반리]
(당연하지)
[반리 누나]
……진짜, 그런 표정으로 웃을 수 있게 됐구나~ 왠지 짜증 나.
[반리]
그러니까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