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이카루가 핫카쿠가 손으로 쓴 원고를 딱 한 장 보내줬다.
한 페이지의 원고지에 단 하나뿐인 장대사.
타치바나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크게 소란을 피우며 대사를 외웠다.
하나뿐인 대사로 뭘 할 수 있냐는 생각을 하면서도, 소란을 피우는 타치바나의 모습이 이해가 됐다.
그 대사는 시적 아름다움, 화자의 깊은 인간성, 배경이 되는 이야기의 무한한 크기가 느껴지는 대사였다.
문화제 무대는 타치바나가 이 한 페이지에서 펼쳐나간 이야기를 각본으로 집필해 공연을 올리게 됐다.
3학년인 타치바나와 나 외에는 거의 신입생인 멤버들 중에서 타치바나가 주연으로 발탁한 사람은 무대 경험도 실력도 없는 배우였다.
나는 준주연이었다.
그 장대사를 내게 맡기지 않은 것에 낙담하고 불만을 품기도 했지만, 내 역할은 내게 완전히 맞춰서 쓰고 싶었다는 타치바나의 말에 이해했다.
이 포지션으로 무대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다.
다음이 타치바나와 만들어내는 마지막 무대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매일매일 연습과 후배를 지도하는 일에 열의를 다하게 됐다.
배우는 물론이고 조명이나 음향에도 힘을 뺄 수 없다.
그 모든 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상대로 완성한 무대――그것이 나와 타치바나의 3년간의 집대성에 어울린다.
그런 내 마음과는 반대로, 연극부 부장 겸 연출가인 타치바나는 미적지근하게 지도했다.
부정적인 지적은 전혀 하지 않는 타치바나의 방식에 내 조바심은 절정에 달했다.
"왜 그 실력도 없는 걸 주연으로 발탁한 거야. 이대로는 본방까지 끝낼 수 없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게 나아. 조명담당은 무대에서도 돋보일 거고 연기 소질도 나쁘지 않아. 그 녀석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안 돼. 준주연 역할이 레니니까 전력으로 꽃피울 수 있는 역할인 것처럼, 이번 주역도 그니까 '그답게'꽃피울 수 있는 역할이야."
"완성도가 이래서는 무대 전체가 어그러질 거야."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 보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자기답게 꽃피울 수 있는가 하는 게, 내가 연극으로 표현하고 싶은 거야."
"――."
"안 될까?"
"……하아. 마음대로 해.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거잖아."
"레니가 있는 한 무대는 어그러지지 않아. 이번 연극의 하이라이트도 레니가 짊어지고 있잖아. 믿고 있어."
"당연하지."
-
문화제가 다음 주로 다가온 어느 날, 질 나빠 보이는 소년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년이 부실을 찾아왔다.
"누구지?"
"자, 여기까지 따라와 줬잖아."
"저기……."
"볼일이 없으면――."
"와줬구나!"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맞이한 타치바나의 말에 의하면, 불량한 쪽이 유령부원인 카시마 유조인듯 했다.
당일 전단을 나눠주는 것 정도는 도와주지 않겠냐고 타치바나가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너는?"
타치바나가 말을 거니, 또 한 명의 소년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저, 저기……."
"내 소꿉친구고 같은 학년인 히나모리 카스미. 얘도 도와줄 거야."
"진짜!? 고마워!"
"그건 고맙군."
타치바나와 내가 감사를 전하니 소년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
"야 카스미, 사인 한 장 안 받아도 되겠어?"
"그런――죄송하잖아! 저, 저기, 힘내세요!"
히나모리가 도망치듯 나가니, 질렸다는 표정으로 카시마도 쫓듯이 돌아갔다.
"태도는 저렇지만 둘 다 보기엔 나쁘지 않네. 배우를 저 녀석들로 바꾸는 건 어때? 지금보다는 나을걸."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거잖아."
"아――."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서 입구를 보니, 이번 무대에 출연하는 후배들이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방아쇠가 된 거겠지.
-
맞이한 문화제 당일――.
집합시간이 돼도 우리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부실에는 편지만 놓여있었다.
말하길, 나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지 않으니 보이콧 하겠다고 한다.
"아차."
"할 수 없지. 네가 내 대역을 해. 너라면 대사도 동선도 외우고 있잖아?"
"그건 절대 안 돼."
"하지만 이대로는 막을 올릴 수 없어. 나 한 명 빠지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
"안 돼! 이 무대는 레니가 없으면 완성되지 않아. 레니와 함께가 아니면 안 돼."
내가 아무리 말해도 타치바나는 완고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이건 나와 타치바나가 만드는 마지막 무대다.
우리의 2년이 이런 형태로 끝나다니――.
절망으로 눈앞이 캄캄해졌을 때 카시마와 히나모리가 나타났다.
"저기! 뭔가 도와줄 거 없나요? 어서, 유조도――!"
"뭐……? 왜 나까지……."
"저는 작년 문화제에서 두 분의 공연을 보고 감동했어요!"
"저와 나이도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이렇게 굉장한 걸 만들 수 있구나 하고…… 연극은 정말 굉장하구나 하고…… 이번 공연도 기대하고 있었어요. 두 분의 마지막 공연이 이런 형태로 끝나는 건 너무 슬퍼요."
"그래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저 둘의 얼굴을 보고 떠올랐다.
그래, 원래 연극부에는 나와 타치바나밖에 없었어.
게다가 무대와 대사가 있으면 연기는 만들 수 있어.
"양아치, 넌 조명을 맡아. 음향은 너. 히나모리랬나?"
"앗, 네!"
"본방 중에 내가 인컴 마이크로 지시를 내릴 테니 시키는 대로 조작하면 돼."
"네? 하지만 무대에 서는 건……."
"너야. 타치바나."
"나……?"
"이 인원수로 제대로 된 연극을 하는 건 이제 틀렸어. 그러니까 적어도 이카루가 핫카쿠가 맡긴 그 한 페이지만 하는 거야."
"딱 한 페이지요!?"
"진심이야……?"
"왜 레니가 하지 않는 거야?"
"그 한 페이지는 네가 문화제에서 무대를 하겠다고 손에 넣은 거야. 책임을 져야지. 나는 갑작스러운 대역 같은 리스크가 큰 연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본심은 타치바나에게 받은 역할 외에는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 역할 외에 관심도 없고 그런 마음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나답게 꽃피워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 대사는 내 대사가 아니야. 그렇지?"
"레니다워."
타치바나는 그리 말하며 웃고, 무대에 설 것을 승낙했다.
모든 것의 발단인 타치바나가 혼자서 이카루가 핫카쿠의 대사와 함께 무대에 선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지막에 어울리는 무대였다.
-
본방.
개연 시간이 다가와도 체육관은 텅 비어 있었다. 지명도도 낮고, 전단도 돌리지 않은 연극부는 이런 법이다.
개연 벨이 울려도 쉴 생각으로 앉아있는 학생들은 무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음악이 흐르고 스포트라이트가 켜진다.
무대 왼쪽에서 타치바나가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대 위에서 타치바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한 시작과 격정적인 발로, 고뇌, 그리고 비애――그저 글자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대사가 살아있는 인간의 말로 영혼을 얻고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아니,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에 압도당했다.
무대에 선 타치바나가 연기하는 정체 모를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타치바나는 단 하나의 대사 속에서 호흡, 억양, 동작, 모든 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이윽고 타치바나가 입을 닫고 숨이 끊어지듯 모습을 감춘다.
"……BG, 조명, 천천히 페이드아웃."
나는 간신히 그리 지시를 내리고, 막을 내렸다.
무대의 중앙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타치바나에게 관객들은 여우에 홀린듯한 표정으로 박수를 보냈다.
몇 분밖에 안 되는 무대였지만, 끝난 후에는 어쩐지 아직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엉망이었던 듯하군."
정신을 차린 건, 이카루가 핫카쿠가 말을 걸었을 때였다.
"모처럼 써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넌 연극을 하는 건 고등학생까지라고 했나. 이제 연극은 관두는 건가?"
나는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몇 분 전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저 대사…… 뒤를 써주면 좋겠어?"
"네!? 그야 물론이죠!!"
소리가 날듯한 기세로 고개를 끄덕이는 타치바나에게, 이카루가 핫카쿠는 히죽 웃었다.
"너희 둘, 졸업하면 극단을 세워라. 가끔이라도 좋으면 내가 직접 각본을 써주지."
하필이면, 괴짜 같은 남자는 그런 말을 뱉었다.
"너희 연기의 완성형이 보고 싶어졌어. 어때?"
"할게요!!"
"야!"
남의 의견도 듣지 않고 즉답하는 타치바나에게 화를 내면서도, 나도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대에 선 타치바나의 모습을 보고 배우로서 섰을 때와는 다른 고양감을 느꼈다.
이 녀석이 또 무대에 오른다면, 그 아름다운 연기를 보고 싶다.
내 인생은 텅 빈 체육관에서 행해진 단 한 번뿐인 일인극으로 뒤틀어진 거다.
-
[이즈미]
……그런 일이 있었군요.
[유조]
내가 '포트레이트'같은 일인극을 좋아하는 건 그때의 영향일지도 몰라.
[이즈미]
그럼 아빠도 처음에는 배우로서 활동했어요?
[유조]
아니, 내가 아는 한 유키오 씨가 본방 무대에 선 건 그때 한 번뿐이야.
[이즈미]
유조 씨는 그걸 계기로 아빠랑 연극을 하게 돼서 MANKAI 컴퍼니에 들어온 거예요?
[유조]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얘기가 길어졌네. 오늘은 시간이 다 됐지만, 다음에 또 천천히 옛날얘기를 이어서 해줄게.
[지배인]
네에~!? 딱 좋은 부분에서 다음 이야기! 인가요?
[츠즈루]
하아…… 하아…….
[마스미]
으으…….
[이즈미]
츠즈루 군하고 마스미 군!? 무슨 일이야!?
[츠즈루]
각본이…….
[마스미]
윽…….
[지배인]
왜 우스이 군까지 쇠약해졌어요!?
[마스미]
같이…… 철야…….
[지배인]
새로운 패턴이네요……!
[이즈미]
어쨌든 둘 다 소파로 옮겨요!
[유조]
새 각본도 다 된 것 같군. 기대할 테니 힘내라.
[이즈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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